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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초대교회의 급진적 포용주의와 성소수자-

 

박 경 미

(성서신학자,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1.

 

성소수자 문제는 성적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핵심을 건드린다. 인간 존재의 일부가 성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인간은 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적 자기정체성과 관련해서 혼란을 느끼거나 억압을 받을 때 인간은 중심에서부터 흔들린다. 동성애라는 말만 들어도 불에 덴 듯이 날뛰는 사람들도, 퀴어축제마다 몰려가서 폭력적인 행태를 벌이는 사람들도 자신의 행동이 실은 한 인간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일상적인 언어폭력과 제도적 차별은 그 자체로서 정치적 폭력이며, 그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일 수 있다.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이러한 차별과 폭력이 자행될 때 그것은 누군가를 죽음에까지 이르는 절망에 몰아넣을 수 있다. 성소수자 문제는 실제 사람의 중심과 인간성에 직결된 문제이고, 사람은 단순한 논쟁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를 대할 때는 언제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원칙 따라야 한다. 이것이 성소수자 문제를 다룰 때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는 이성애자에 비해 말 그대로 소수일 뿐 오랜 역사 속에서 늘 존재해왔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인간만이 아니라 1500여종에 이르는 동물들에게서 동성애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코끼리, 기린, 펭귄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동성애 혐오는 인간에게서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미국심리학회는 이미 1973년 정신병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했고, 1987년에는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목록에서 동성애를 완전히 제거했다. 또한 세계보건기구도 1992ICD(국제질병사인분류) 목록에서 동성애를 제거했다.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으며,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은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거슬러서 동성애는 죄이며, 고쳐야 할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은 “2018년 한국사회 주요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을 조사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가 죄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개신교인의 응답률이 18.5 퍼센트인데 비해 개신교인은 53.5 퍼센트에 달했다. 또한 동성애가 질병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인 간 차이를 보였다. 개신교인 45.2%, 비개신교인 23.5%가 동성애를 질병으로 인식했다. 또한 동성애가 에이즈와 같은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개신교인 55.1% 비개신교인 35%그렇다고 응답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개신교인이면서 나이가 많을수록 동성애가 죄이고 질병이며 에이즈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젊을수록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그래도 희망적이다.

동성애 반대행위는 명백한 혐오행위이다. 그런데 어째서 많은 개신교인들이 그런 태도를 보일까? 그들에게는 그 어떤 과학적 사실로도 설득할 수 없는 그들만의 진리가 있는가? 소위 기둥 같은개신교 목사들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주요 현안들에 대해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를 교회의 윤리적 아노미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어째서 유독 동성애 문제만은 그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까? 어쩌면 아직 우리 사회에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만연해 있으니 거기 편승해서 종교적으로 동성애를 혐오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개신교 집단의 도덕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한다고 해서 내가 의로워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성애는 죄라는 성서 구절들, 그리고 거기 근거한 목회자들의 반복적인 세뇌이다. 이러한 성서 본문을 다룰 때는 크게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자주 이용되는 고작 몇 개의 성서 본문보다는 성서 전체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본적인 의미에 근거해서 성소수자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둘째, 성서는 과거 이스라엘과 교회가 역사 속에서 하느님과 만났던 경험을 기술한 책이고, 이 때문에 성서는 인간적 경험과 주관, 편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성서도 틀릴 수 있다. 성서에는 온갖 차별, 즉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급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구절들이 있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러한 구절들은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러므로 성서를 정말로 복음으로, 인간을 자유케 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읽으려면, 성서 본문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성서 본문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과 그 한계를 고려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급진적 포용주의, ‘사랑에 입각해서 개별 본문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해서 교회와 기독교전통이 과거에 보여주었던 급진적 포용주의 전통을 이제 성소수자 문제와 관련해서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예제나 여성의 지위 문제, 이혼 문제 등과 관련해서 인류의 문명사적 의식의 변화를 이끌기도 하고 또 끌려가기도 하면서 교회가 과거 성서에 근거해서 보여주었던 급진적 포용주의를 성소수자 문제와 관련해서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은 성소수자는 2천년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스스로 변화하며 포용해온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록 가운데 이제 새롭게 덧붙여져야 할 또 하나의 포용대상일 뿐이다. 이 일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기왕에 교회가 수천 년 동안 해온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이야말로 복음서에서 예수가 당시 유대 당국에 맞서 죄인들을 환대했던 행동, 즉 사랑에 근거한 급진적 포용주의를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구약성서 레위기의 성결법전을 비롯해서 신약성서의 몇몇 구절들에는 동성애는 죄라는 관념이 나타난다. 이것은 아마도 성서 시대의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관념이고, 현재 급격히 바뀌어가는 중에 있기 때문에 첨예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념을 극복해야 할 편견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하느님이 주신 윤리적 명령으로 볼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성적 지향과 관련된 과학적 지식이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성서 구절들의 타당성을 가늠하는 잣대로서 성서 전체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또 하나의 판단기준이 될 수 있다.

우선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비율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통계를 내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이 존재해온 이래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는 늘 있어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에서 동성애를 죄악시한 것이 아니라 문화에 따라 동성애를 오히려 이상적인 관계로 보아온 전통도 있다. 알려져 있듯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성 간의 사랑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플라톤은 향연에서 젊은 남성과 철학자의 사랑을 이상적인 사랑으로 기술했다. 또한 사회적, 법적 지위에 상관없이 상당수의 위대한 예술가, 작가, 성직자가 동성애자였다. 동화작가 안데르센,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프란시스 베이컨, 에라스무스, 신학자 안셀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 시인 월트 휘트먼, 도스토예프스키, 버지니아 울프, 배우 그레타 가르보 등 동성애자, 내지 양성애자의 목록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석기시대에도 동성애자는 있었을 것이다. 이들을 모두 비정상적 죄인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종과 계급, 교육 정도, 성적 차이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동성애가 있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오늘날 의학적으로나 정신분석학적으로 동성애나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 고쳐야 할 질병이 아니며, 고칠 수도 없다는 데 대해서는 전반적인 학계의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 비해 높은 범죄율을 보인다거나 신경성 질환을 앓고 있지도 않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 전체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소식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보더라도, ‘동성애는 죄라는 관념은 극복되어야 할 편견이다. 이 편견으로 인해 복음이어야 할 성서가 성소수자들에게는 저주가 된다.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성적 지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고 한다. 성서가 한 인간이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성서 자체에 대한 배반이자 모독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서가 시대의 한계를 지닌 문서라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성서 안에서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본문들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인 성소수자들에게 부담이 된다.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보이는 본문도 그 맥락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세계교회협의회를 비롯해서 교회 내 성소수자 문제를 연구하고 서로 다른 견해들 사이에서 대화하고 일치를 이루는 길을 모색해온 캐나다와 미국의 교회들에서 1980년대 이후 활발하게 해왔다. 여기서는 그들의 작업과 지금까지 나온 주요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일부 소개하겠다.

성서 안에는 오늘날 LGBT라 일컫는 성소수자들 전체의 성적 지향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은 없고, 동성애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본문들이 있다. 그 중에 예수의 말씀은 없으며, 동성애 행위를 실제로 언급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동성애와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는 본문은 10여 개 정도 된다.(1:27-28; 2:18-25; 19:1-29; 18:20-23; 19:1-30; 23:17; 왕상 14:24; 15:12; 22:45; 왕하 23:7; 1:18-32; 고전 6:9-11; 5:33; 5-7) 이 본문들은 두꺼운 성서 전체로 보면 모두 합쳐도 3-4쪽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기 위한 근거로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 자주 인용되는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와 레위기의 성결법전,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언급들을 다룰 것이다.

 

1) 구약성서 본문들: 창세기 19장과 사사기 19:1-30, 레위기 1822, 2013

 

전자의 두 본문, 즉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와 사사기 19장의 레위인의 첩 이야기에서는 나그네 환대에 대한 맥락에서 동성애 행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두 이야기에서 집주인들은 나그네를 집으로 맞는데, 성난 마을 사람들 무리가 집을 둘러싼 채 손님을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한다. 이때 무뢰한들은 우리가 그 사람과 관계를 해야겠소”(19:5; 19:22)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동성애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동성애 이전에 그들이 하려는 행동이 강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동성 간의 강간이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고대 세계에서 동성 간 강간은 승자가 포로가 된 적들의 복종을 강요하는 전통적 방법이었다. 고대 문화에서 남성에게 가장 부끄러운 경험은 여성처럼 취급당하는 것이었고, 남성을 강간하는 것이 가장 난폭한 처우였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성애 자체보다 남성 세계에서의 힘의 과시, 폭력이 훨씬 더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다.

또 한 가지 기이한 것은 두 이야기에서 집주인인 롯과 익명의 노인은 둘 다 자신에게 결혼하지 않은 딸이 있으니 손님 대신 딸을 강간하도록 내주겠다고 한다는 점이다. 창세기 이야기에서는 신적인 개입으로 롯의 딸들이 강간을 면하지만, 사사기의 이야기에서는 레위인의 첩이 밤새 윤간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무뢰한들이 반드시 동성애자로 전제된 것이 아님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 문제가 이야기의 배경으로 깔려 있음을 말해준다. 니시넨에 의하면 고대 근동 사회에서 중요했던 것은 오늘날과 같은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젠더 문제였고, 따라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한 문화권에서는 심지어 자신의 딸이나 아내라 할지라도 여성보다는 자기 집에 온 남자 손님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남성의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동성에 의한 강간은 막아야 하고, 이를 위해 여성이 대신 강간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성애금지와 여성에 대한 차별이 가부장제의 유지를 위한 작동기제임을 말해준다. 달리 말하자면 이성애강요는 남성중심의 결혼/가족제도의 유지를 위해 강제적으로 자리잡은 것일 수 있다. 위의 두 이야기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고려할 때 이 두 본문들은 동성애를 비난하는 본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윤간이라는 형태의 폭력이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된다. 무엇보다도 나그네 환대가 두 본문의 일차적인 주제이고, 남성들 간의 힘의 과시로서 남성에 대한 강간, 젠더 상 여성의 취약한 위치가 배경으로 전제된다. 창세기 19장 이야기의 경우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을 예고하는 맥락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소돔의 죄를 동성애라고 보게 되었을 것이다. 영어에서 Sodomy라는 단어가 동성애를 뜻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소돔의 죄는 동성애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사실상 소돔의 죄는 동성애 행위와 아무 관련이 없다. 구약성서 다른 곳에서 소돔의 죄를 언급할 때도 그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압제와 불공정, 지나친 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 등 개인적, 사회적인 여러 가지 악을 가리킨다.(1:10-17; 3:9; 23:13; 16:49 ) 신약성서에서도 누가복음 10:12와 마태복음 10:15에서 예수는 여행 중인 제자들을 환대하지 않는 도시들에 심판을 선언하는 맥락에서 소돔의 죄를 언급한다.

다음에 레위기의 두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소위 동성애 행위에 해당하는 남성 간의 성행위, 즉 항문성교를 죄악시하고 있다. 이 두 본문은 성결법전에 해당한다. 성결법전은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흩어져 있는 복잡한 제의적 법으로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부정한 상태에 대한 예시와 금기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그중에서 위의 두 구절은 동성애와 관련해서 자주 인용된다. 이집트의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에 정착하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굶주림과 이민족의 공격,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부족이나 민족으로부터 구분해주는 성결함의 객관적 표지를 얻고자 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질병을 막기 위해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족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들은 삶의 전 분야에서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성결을 유지함으로써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고, 이를 위해 그들은 성결법전을 발전시켰다. 성결법전을 지킴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도망쳐 나온 이집트 땅 사람들과도 달라져야 했고, 이제 들어온 가난한 땅 사람들과도 구별되어야 했다. 거룩하게 구별되기 위해 이스라엘은 주변 종족과 다른 제의적 관행을 지켜야 했고, 다른 민족과 섞이거나 이방 관습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무엇이든 혼합은 거부되었다.

그리고 정체성 유지를 위해 또 하나 중요했던 것이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고, 그럼으로써 남성의 우월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레위기에 의하면 남성의 우월성을 훼손시키는 행위들은 죽음의 벌을 받는다. 동성애 행위를 하는 사람은 여기에 해당했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 즉 수동적으로 관통, 삽입되기 때문이었다. 관통/삽입된 남자는 불결하다고 간주되었다. 성역할이 혼합됨으로써 그 남자는 문화적 경계선을 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항문성교를 명백히 비난하고 있는 레위기의 이 본문들은 수천년 전에 기록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문화권에서는 남자를 여자처럼 대하는 것을 모욕과 정복의 한 방식으로 이해했고, 그 점에서 이 본문은 여성에 대한 열등시와 관련이 있다. 동성애에 대한 죄악시는 여성에 대한 차별, 가부장제와 긴밀한 관련성을 지닌다.

한편 이 본문은 실제로는 항문성교를 금하는 본문인데, 그것을 동성애 금지로 해석해온 전통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 어째서 항문성교를 동성애와 동일시하는가? 항문성교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 둘 다 할 수 있고, 실제로 레위기 본문은 이성애자의 항문성교를 상정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데 어째서 동성애와 항문성교를 동일시하고,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성도착의 이미지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지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전체로서 성적인 존재이지만, 한 인간을 성적인 존재로만 규정하는 것은 폭력이다. 고대종교에서는 위생 문제와 종교적 성결이 결합되었지만, 근대 이후 이 둘은 분리되었고, 사실 오늘날 항문성교는 종교적, 윤리적 문제라기보다는 위생적, 의학적 문제이다.

어쨌든 이 본문은 구약성서 안에서도 소위 동성애 행위를 가장 분명하게 비난하는 본문에 해당한다. 그런데 동성애를 비난하기 위해 이 본문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기독교인들은 성결법전의 다른 내용들은 무시해왔다. 왜 다른 부분들은 무시하면서, 가령 피가 섞인 고기를 먹고 두 종류의 섬유로 이루어진 옷을 입는 행동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이 부분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15:10-11)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성결법전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예수는 성결법에서 더럽다고 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법의 핵심이고 거룩하게 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레위기에 기록되었다고 해도 오늘날 우리가 적용하지 않는 규정들은 넘쳐나며, 레위기의 이 구절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아도 될 이유 역시 넘쳐난다.

 

2) 신약성서 본문들: 고린도전서 69, 디모데전서 110, 로마서 126-27

전자의 두 구절에서는 arsenokoitesmalakos라는 단어가 남성의 동성애 행위를 가리킨다고 해석되어왔다. 고린도전서는 도덕적 문란으로 악명을 떨쳤던 고린도 사람들에게 바울이 쓴 편지이며, 69-11절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부도덕한 행위들을 나열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6:9에서 남창”(malakoi)동성연애를 하는 사람들”(arsenokoitai=문자적으로는 남성 성교”)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호슬리에 의하면 후자의 경우 이 단어가 쓰인 가장 초기의 예에 해당하며, 바울 이후 저자들은 동성연애관계라는 의미로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이 단어들이 각기 남성 간의 성행위에서 수동적파트너와 능동적파트너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이 말들은 자위행위자남창을 가리킬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러한 애매함 때문에 니시넨은 현대의 동성애 개념을 바울의 본문에 투사해서 읽어서는 안 되며, 고린도전서 6:9에 근거해서 모든 동성애적 관계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 단어의 의미가 너무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를 정죄하는 말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이 말은, 아마도 동성애자 친구를 가지지 못했을, 바울 자신의 경험의 세계 안으로 한정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동성애가 선택사항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바울이 직접 쓰지 않은 제2바울서신에 해당하는 디모데전서의 본문에도 역시 동일한 단어들이 나오며, 따라서 같은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126-27에서 바울은 남성 간의 동성애적 행위만이 아니라 여성 간의 동성애적 행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앞서 레위기 본문만큼이나 분명하게 동성애 행위를 비난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동성애 행위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인 견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맥상 이 본문에서 바울은 우상숭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 성 자체를 주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알만한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음에도 이방인 역시 우상숭배를 범하고 있고,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게 되는 온갖 악행을 나열하는 중에 남성 여성 동성애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 1:18-32을 이끌어가는 논제는 그 앞에 나온다. 1:16-17에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며, 유대인을 비롯하여 그리스인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1:17)이라고 한다. 누구도 하느님의 구원의 가능성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1:18-32에서 바울은 우상숭배와 우상숭배에서 비롯되는 다른 죄들, 즉 불의와 악행과 탐욕, 악의, 시기, 살의, 분쟁 등에 대해 말한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에 헌신할 때, 즉 우상숭배를 할 때 우리가 빠지게 되는 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적 행위이다. 2:1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변명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우상숭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도 의롭지 않다. 여기서 바울은 인의론의 기본 원리, 즉 아무도 의롭지 않으며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성애가 죄임을 말하려는 것이 이 본문들의 주제는 아니다.

신구약성서의 동성애 관련 본문들에 대해 검토한 결과 확실한 것은 어느 본문도 동성애 자체를 주제로 다루거나 특정한 성적 지향을 문제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의 성적 지향 자체를 윤리적 문제로 삼는 것은 성서 시대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글들을 비롯하여 성서의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전제를 인정한다 해도 그것을 오늘날 동성애 반대를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는 예수의 선포와 가르침에 비추어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성서 안의 개별 구절들은 지양되어야 한다.

 

3) 창조의 다양성과 성소수자: 창세기 127-28, 218-25

 

성소수자 문제는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가족 개념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성소수자는 남녀 양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가족 형태의 변화를 예고한다. 이와 관련해서 창세기의 인간창조 이야기는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동성애자들을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한국교회는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가족을 이루게 하셨으므로 남녀의 사랑은 창조 질서를 따르는 것이고 동성애는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서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7)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일차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지, 남자와 여자로만 창조된 것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것은 특정한 목적과 필요에 따라 이차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서로 다르게 창조하셨는가? 여자와 남자의 서로 다름 속에서 서로 다름을 용납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서로 다름 속에서 일치와 사귐을 이루어가라고 하느님은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지은 것이다. 하느님은 서로 다르고 다양한 자연생명과 인간의 세계를 보고 기뻐하셨다. 서로 다르고 다양한 차이는 차별과 두려움의 근거가 아니라 기쁨과 고마움, 은총과 축복의 근거이다. 하느님은 자연생명과 인간을 획일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생명과 인간들은 서로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은총과 축복으로 알고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창조한 것은 서로 다름 속에서 서로 다름을 넘어서 깊은 사귐과 하나됨을 이루어 생명과 정신의 깊이와 풍요로움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의 차이와 낯섦 속에서 더욱 깊고 높은, 다양하고 풍부한 생명과 정신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느님은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로 된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것도,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며, 오히려 다름과 낯섦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향유하라는 하느님의 부름이다. 그러므로 만일 한국교회가 동성애를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죄악으로 정죄한다면, 그것은 자연생명과 인간에게 동성애를 허락하신 하느님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자연생명과 인간을 잘못 창조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자연만물과 생명과 인간정신에는 서로 비슷하고 같은 것끼리 가까이 하고 끌리는 성향이 있다. 비슷하고 같은 것끼리 사귀고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비슷하고 같은 성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끌리고 좋아하는 것을 비난하고 정죄할 이유가 없다.

자연생명세계와 인간세계에 동성애가 있다는 것은 남녀의 구분이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과 뜻을 위해서 생겨난 것임을 가리킨다. 동성애와 남녀의 사랑은 성적 사랑의 서로 다른 방식이다. 동성애와 남녀 사랑은 둘 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지만, 둘 다 아름답고 소중하다. 남녀의 사랑에서 벗어난 동성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 더욱 깊고 다양하고 풍부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기쁘고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겸허하게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3.

 

예수는 당시 유대사회의 법체계에 의해 더러운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고, 그들을 하느님나라로 초대했다. 법에 의해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이웃으로 받아들였다.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죄인을 이웃으로 바꾸는 사랑의 기적을 일으켰다. 예수는 기존사회의 법과 통념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다수성에 근거한 도덕적 우월감에 편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윤리의식이 지니는 상대성과 한계를 드러내고, 법과 윤리가 근거해야 할 근원적 토대로서 하느님의 급진적인 사랑을 제시했다.

예수가 촌락들을 중심으로 떠돌아다니며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했던 떠돌이 설교가요, 귀신축출자, 치병가였다면, 바울은 헬레니즘적 도시들을 중심으로 이제 막 태어난 공동체들을 그리스도의 소식에 기초해서 키우고 가꾸어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해방선언인 복음의 기본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달라진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실천하려 애썼다. 그래서 예수의 급진적인 해방의 소식은 바울의 선포 곳곳에서 살아 숨쉰다. 바울이 쓴 편지들 중에는 로마서 1:26-27처럼 동성애 행위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본문이 있는가 하면, 근본적으로 그러한 시대적 편견을 무효화하고,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시대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편견과 혐오를 지양하고 새로운 포용을 향해 나가도록 하는 본문들이 있다. 이처럼 시대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가 가르친 복음의 급진적 포용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때로는 모순과 한계를 보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고투했던 사람들 중에는 단연 바울이 제일 앞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328절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인종과 계급, 성별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임을 역설하는 힘찬 해방의 선언이자 급진적 포용주의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1:26-27에서 동성애 행위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던 바로 그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급진적인 포용의 선언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천명하는 대로 교회는 역사적으로 그 구성원의 범위를 계속해서 확대해왔다. 유대교 언저리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될 무렵 일차적인 포용의 대상은 이방인이었고, 바울은 그의 전 선교활동에 걸쳐 이방인이 조건 없이 동등한 공동체 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고 맞서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교회는 이방인만이 아니라 노예와 원주민, 여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교회의 동등한 구성원의 범위를 확대해왔다.

초기 기독교 운동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로마 사회에서 가정교회는 온갖 계층의 다양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회 단체였다. 로마 헬레니즘 사회에서는 비슷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 상례였고, 노예나 여성, 하층민들이 가입할 수 있는 공적 단체라고는 거의 없었다. 오직 교회공동체만이 원칙적으로 모든 신분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단체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많은 하층민들, 특히 여성들이 참여했고 그들의 활동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갈라디아서 328절은 초대교회의 이러한 개방성과 급진적 포용주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학자들의 결론에 의하면 갈라디아서 326-28절은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세례고백문을 인용한 것이다. 당시 초대교회에 입교했던 사람들은 세례 때 이와 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결단을 나타냈다. 28절은 구체적 실천을 담보로 하는 고백문으로서 현실에서의 객관적인 변화, 지금까지의 사회적 역할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모두 하나다라는 말은 예수운동의 인종적, 사회적, 성적 포용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하나됨을 선언한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heis, 하나는 포용과 통일성을 뜻한다. 갈라디아서 326-29절을 주석하면서 마틴은 이 본문이 예전에 서로를 서로에게서 분리했던 구별이 사라지고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부터 모두 하나라는 포괄적인 포용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했다. 차별 없는 포용이 핵심이다. 인종적, 성적, 계급적 구분은 제거되지는 못하더라도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즉 노예와 주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백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새로운 자세를 가지고 실제로 변화된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적 계급사회 안에서 명백히 하위집단에 속했던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불리면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신앙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회 내에서 실질적인 차별철폐까지 요구하는 사회적 평등선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교회는 이러한 급진적 포용주의를 통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안에 전혀 다른 인간관계,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의 비전이 누룩처럼 번져가게 했을 것이다. 일단 누구나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한 공동체 안에서 이질적 사회집단이 함께 부대끼면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차츰 사회적 평등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가능해진 은혜와 용서, 자비에 모두 동등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 사후 초기 교회에서의 평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피오렌자를 비롯한 여성신학자들이 말하듯이, 갈라디아서 328절은 가부장적 계급사회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대안적인 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주었을 것이다. 당시 노예들이나 여성들은 이런 자유와 해방의 선포를 공연한 빈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진실로,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말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이 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노예제도가 보편화된 남녀차별 사회 속에서 이 말을 충격적으로, 있는 그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사실 예수의 삶과 초기 가정교회에서 실현된 평등한 제자직에 관한 기독교의 비전은 많은 노예들과 여성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그들은 이것을 막연한 공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교회공동체를 찾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초대교회의 급진적 포용주의는 공동체 밖에서도 파장을 일으켰고, 이것이 기독교가 당시 지중해연안에서 백가쟁명하고 있던 다양한 종교들 가운데서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주요 요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처럼 바울 공동체들의 기본바탕을 이루었던 갈라디아서 328절의 선언은 여성들, 노예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쁜 해방의 선언이었지만, 부유한 노예소유자들이나 남자들에게는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동성애자를 받아들이기 어렵듯이 용납하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열등한 존재로 여겨왔던 노예나 여성들을 형제요, 자매로 인정해야 했다. 오늘날 동성애자를 있는 그대로 교회 안에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듯이,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공동체 안에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공동체 내의 다양한 분쟁과 갈등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바울 이후 바울 계열의 저자들이 쓴 에베소서, 골로새서와 목회서신의 가정훈령에서는 다시 신분적, 성적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퇴행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갈라디아서 328절이 내포하는 혁명적 변화가 교회 내에서 야기한 혼란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구절들은 갈라디아서 328절의 세례고백문이 가져온 실질적인 파급력을 입증하는 역설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초대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인종과 계급, 성별에 따른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역할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그들의 제자됨과 섬기는 능력에 따라 구별되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었다는 바울의 선포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심리적 태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존재의 변화,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의 변화를 나타낸다. 새로운 공동체로의 가입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인 세례는 바로 그러한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의 변화에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관계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 초대교회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있는 그대로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 받아들였듯이, 오늘 우리는 성소수자들에게 이성애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교회의 동등한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여야 한다.

갈라디아서 328절은 세례받은 개인에 대한 진술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태도에 대한 자기정의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떤 지배구조와 차별도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세 가지 범주로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인종, 계층, 성별의 구분과 무관하게 모두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상황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 조항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하나다.” 갈라디아서 328절이 당시 사회에서 혼란과 갈등을 초래했듯이, 이 새로운 조항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갈라디아서 328절의 선언을 지키고 실천해왔듯이, 오늘 우리도 동성애자를 비롯하여 성소수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온전한 지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오랜 역사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지켜온 복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소수자는 이방인 고넬리오의 선교에 앞서 미리 베드로의 환상 속에 나타난 하느님이 질색하는 베드로를 향해 먹으라고 했던 온갖 더러운 벌레들 중 마지막 남은 벌레인지도 모른다.(10) 이때 거부하는 베드로를 향해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 하느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10:15)고 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성소수자를 우리가 더럽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특정 성적 지향을 죄악시하는 것은 오랜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근거해 있다. 전통과 경험, 관습에 근거한 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존립근거인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 근거해서 이제 기독교인들은 오랜 편견을 떨치고 살아 있는 인간,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웃인 성소수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수지만 우리 가운데 일부는 동성을 향한 성적 지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이성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자신의 성적 지향을 도덕적으로 책임 있게 표현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길을 막는 것이야말로 성서와 율법을 앞세워 예수와 바울을 배격했던 사람들 편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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